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너럴 셔먼호 사건 (문단 편집) === [[신미양요]]와 5년이나 차이나는 이유 === [[병인양요]]는 [[병인박해]] 직후 [[프랑스]]의 보복으로 일어났지만, 신미양요(1871)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에 5년이 지나서야 일어났다. 신미양요와의 시간적 간격이 큰 이유는, 애시당초 제너럴 셔먼호 사건 자체가 미국 정부의 지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민간상선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조선은 이미 [[병인박해]] 때문에 [[병인양요|프랑스가 조선에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외교적으로 좋지 않은 시점을 택할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해 무장상선에 불과했던 제너럴 셔먼호가 몰살당한 것은 바로 이 해적행위 때문이었다. 병인양요 직전이라 조선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대해주고 보내주려는데 해적행위를 했다는 것.[* 당시 서구에서도 해적행위는 교수형이 기본이었다.] 게다가 애시당초 셔먼호가 정부 소속이거나 지시를 받았더라면, 아무런 외교적 군사적 대책도 없이 조선인들 상대로 행패를 부리고, 도주 경로 확보도 없이 무턱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몰살을 자초하는 병크 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 뒷날의 신미양요 때 온 미군들은 이 사건을 일으킨 이들보다는 제법 신사적이긴 했다. 대원군의 철수 권고 편지에 정중하게 거절하고(병인양요 때는 훈련대장 이경하와 극동 함대 제독 로즈가 살벌하게 대립했다.) 파괴, 방화, 약탈도 프랑스보다는 덜했다. 단 전사자 숫자는 신미양요 때가 더 많았다.] 더군다나 발생 년도는 1866년으로 남북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지 겨우 1년 뒤였다. 미국 본토에서는 [[남북전쟁]]의 참화를[* 미국이 워낙 전쟁에 능하고 여러 네임드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사실이지만 남북전쟁은 미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이었다. '''심지어 이 당시 죽은 미국인이 제2차 세계대전때보다 더 많았다.''' 미 본토에서 일어난 마지막 전쟁이었기에 미국인들이 많이죽었던 건 당연했던 것.] 수습하기도 벅찬 마당에 전임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암살]]당해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후임자로 올라 상황을 수습하던 상태였다.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미 정부는 직접 탐문 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와추세트호, 그 다음해인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방문의 목적은 정보 수집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모두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다. 신미양요가 일어날 때까지 전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한편, 셰난도어호가 방문했을 때 조선 정부는 미국에 공식 회답을 보내 제너럴 셔먼 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 때 미국은 조선이 아니라 [[청나라]]에도 정보를 구함과 동시에 "님들 지방 정부가 이랬는데 혼좀 내주셈."이라는 컴플레인을 걸었다. 즉, 당시 조선은 미국에게 있어 청나라의 자치주 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셈. 하지만 청나라는 이에 대해 "걔들 독립국인데? 우리 소관 아님."이란 통보를 내준다. 따라서 '''미국이 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는 데만 3년이 걸린 셈.''' 얼마나 정보가 없었느냐하면, 제너럴 셔먼호가 무장 상선인데 동아시아인 조선 군대에게 아작났다는 것, 그리고 청나라의 속령이 아닌 독립국이라는 것을 근거로 조선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해버렸다. 여기에 신미양요 초반부에 대원군이 병인양요 등을 거치면서 준비한 최대의 방어 병력이 보여준 포격을 보면서, 미군은 그에 더해서 최대한의 함포 사격을 하고 다시 공격을 했는데, 결과는(...) [[신미양요]] 참고. 게다가 이 사건에 대해서 조선이 정보를 제공하며 협조를 했는데도 이 정도다. 그리고 미 정부도 조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논의하고, 이를 다시 동아시아 지역 책임자(베이징 공사)에게 전하고, 베이징 공사는 정보를 수집하고, 군사를 정비하고....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5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미국 본토 역시 [[남북전쟁]] 뒤처리로 바빴다는 점. [[신미양요]] 2년 전인 1869년에서야 미 대륙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덜 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조선의 개항은 대외 정책의 큰 틀, 특히 대 러시아 정책과 관련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일이라는 점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꽤 지나서야 발발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